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하느님께 순수한 기도가 바쳐지는 살아있는 제단이 되고, 이 기도가 우리의 모든 행위에 배어있기를.
(회헌4.4)
1. 하느님의 부르심
거의 3천년 전부터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살아있습니다: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호세2,16) 하느님은 우리를 끌어 당기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로잡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넘치는 그분 사랑에 우리를 참여시키기를 원하시고 << 주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 신의 로써 아내로 삼으시기를 원하십니다.>>(호세2,21-22) 그리고 사막으로 이끄십니다. 고독과 포기 건조함과 목마름… 그러나 사막에는 오아시스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은 기쁨 안에서 솟구칩니다!
그분을 위해서 카르투시오 수녀승들은 모든 것을 떠났습니다. 그분과 함께 그들은 삽니다. 그분 안에 그들은 머무릅니다. 하느님께서 정말로 우리에게 그분 만을 위해 살라고 강요하실 수 있을까요? 그분은 우리에게 그것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오히려 그것을 기다려주십니다. 그분께서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이들 가운데 작은 무리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바쳐 그들의 창조주를 찬양하고 구세주를 찬미하는 것이 그분께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카르투시오에서의 삶은 절대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홀로, 영원히.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부르심의 주도권은 친밀한 사랑 안에서 당신과 일치시키시려고 모든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형제적 사랑 안에서 발산되는 오직 하느님 한 분과의 결합에 대한 더하든 덜하든 숨겨진 갈망을 통하여 세례받은 모든 이의 마음에 새겨져있습니다. 이 갈망은 자신의 전 생애을 하느님께 바치를 원하는 사람들 안에서 더 강렬하게 드러납니다.
카르투시오 성소는 세례 소명의 개화이며 부름받은 이는 어떠한 중개자 없이 살도록 초대받습니다. 우리 사부 성 브루노는 카르투시오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부르심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허락하시는 그분의 순수한 선물일뿐 단지 그것을 원한다고 그것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은총은 본성의 겸손한 길을 통해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소를 희망하는 사람은 고독과 우리 삶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 신적 부르심을 인식할 수 있는 신체적 정신적 자질을 지녀야합니다. 달리 말하면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며 자아포기 안에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 나아간다면 이 지원자는 조금씩 자기 인격의 모든 차원 안에서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이 식별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청원기와 수련기 동안은 물론이고 ‘서원기’( 장엄서원의 결정적 서약을 준비하는 긴 시간동안을 말합니다.) 내내 이루어질 것입니다.
2. 응답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 잡혀 카르투시안 수녀승은 그분께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는 그분과 세상에 있는 그분의 사람들을 극렬하게 사랑하는 희망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는 그분의 사랑으로 그분께서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합니다. 그는 사막에서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은 그가 그분을 따르는 일에 언제나 더 깊게 투신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떠나는 일이 끝났습니까? 그분의 얼굴을 찾는 일이 끝났습니까? 하느님은 영원히 지속되는 새로운 사랑에 끊임없이 충실하십니다. 카르투시오 수녀승에게 있어서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과 머물고 그분의 성실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멈추지 않고 사막을 계속 걸어가는 기쁨을 통하여 언제나 새로운 사랑으로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카르투시오 사막은 사하라 탐험보다 더 열정적인 아름다운 모험의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수녀승은 주님을 향한 그의 비상을 방해하거나 끊어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길가에 놓아둡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수녀승을 당신의 신부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카르투시오의 은수처 안에서 모든 단조로움, 모든 기쁨과 함께 그분께 온전히 바쳐진 이 삶을 수녀승을 위해 원하십니다. 수녀승도 그것을 원하고 주님의 가장 작은 원의에도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두가지 형태
카르투시오 수녀승의 성소는 두가지 형태로 살아질 수 있습니다: 봉쇄 수녀승들과 converse 수녀승들. 이 두가지 형태 모두 완전하게 관상적이며 관상을 향해 방향지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약간 다릅니다.
봉쇄 수녀승들은 기도와 공부, 일을 하며 하루 중 대부분을 그들의 독수처에서 지냅니다. 그들은 공동체 전례의 거행에 주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독수처에서 바느질, 직조, 타이핑, 목공, 제본, 이콘제작, 정원일 등 다양한 노동들을 수행합니다. 예수님의 가난하고 감춰진 나자렛의 삶 안에서 그분과 일치하며 일하는 것은 관상적인 일입니다. 공동체의 선익을 위하여 참된 순명으로 영감을 받은 일들을 통해 성부의 뜻에 일치하는 것은 하느님을 열렬히 갈망하는 모든 이에게는 무한한 양식이 됩니다. 손으로 하는 육체노동은 아주 단순한 기도, 내적 손님과 거의 끊이지 않는 대화를 하기 쉽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가장 힘든 일들은 수녀승을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의 수난에 더 깊게 일치하도록 초대합니다.
converse 수녀승들
Converse 수녀승들은 참된 고독의 삶을 영위합니다. 기도와 공부 외에 그들 하루 중 한 부분을 그들의 독수처 밖 수도승원 안에서 일합니다. 그들의 주된 일은 보다 실용적인 공동체 봉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독수처보다는 <<소임지-obedience>>라고 불리는 곳에서 일을 할 것입니다: 이곳은 주방, 세탁실, 접대실, 의무실 등이 될 수 있습니다. Converse 수녀승들은 그들의 소임에 따라 공동체를 위한 여러가지 가사일과 수도승원의 관리에 헌신합니다. 가끔씩 그들은 서로 돕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고독 속에서 일을 수행합니다. 일반적으로 Converse 수녀승은 성당의 가대에서 봉쇄 수녀승들과 함께 같은 전례에 참여하지만 노래 또는 침묵기도 중 어느것 하나를 선택할 수있습니다. 고독 속에서 바치는 그들의 전례적 성무는 시편이나 주모경으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봉쇄 수녀승들과 Converse 수녀승들은 카르투시오 공동체들에게 주어진 사명-교회의 심장에 완전히 관상적인 은수자들 무리가 존재토록 하는 것-의 책임을 서로 보완하는 형태로 나눠 맡습니다.
3. 양성 단계
양성
양성 과정
수도승원에 오는 젊은 여성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여정을 따릅니다. 모든 것은 그녀 안에서 관상으로 질서지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부르심에 따라 그의 전 인격이 조금씩 그리스도로 변화되도록 성 브루노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동시에, 양성은 인간적인 면과 영적인 면에서 그의 인격의 완전한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을 지향합니다. 양성은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찾는 내적 모험입니다.
카르투시오의 수녀승이 되기를 희망하는 젊은 여성은 다음 단계들을 거칠 것입니다.
지원기: 카르투시안 카리스마에 따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짧은 방문을 해야 합니다. 그후 수도승원 내부에서 일주일 동안의 피정과 마지막으로 각자의 가능성에 따라 반복할 수 있는 한달 피정을 하도록 초대받습니다. 이렇듯 첫해는 수녀승들과 수도승의 삶을 알기 위한 접촉으로 이루어집니다.
청원기: <<망토>>를 입고 봉쇄구역 안에서 생활합니다. 일년동안 그는 공동체 규칙들을 지키면서 성소식별에 동반을 받습니다. 청원기 허락이 가능한 나이는 만 35세까지 입니다.
수련기: 2년간 지속되며 청원자는 카르투시오 수도복을 입고 수도회의 친교에 받아들여집니다. <<착복식>>예식은 카르투시오 가족으로의 더 깊은 동화를 가시적으로 표현합니다. 수련자는 영성 생활과 전례 공부 그리고 카르투시오 규칙들로 양성되며, 잠심 안에서 일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교의와 수도승 양성을 보완하기 위해 지정된 공부를 시작합니다.
첫서원: 수련기가 끝나면 후보자는 3년간의 서원을 서약합니다. 서원은 그의 전인격을 사랑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자유롭고 의식적인 선물입니다. 유기서원자는 서원을 상징하는 <<밴드-띠>>가 추가된 쿠쿨(또는 스카풀라)을 입습니다. 이 양성단계는 수련장 수녀승의 지도하에 이루어지며 수련장은 인간적이고 영적인 양성의 길에서 항상 그를 동반합니다. 이 3년 동안 유기서원자는 수련소에서 시작한 영적, 수도승적 양성을 심화시킬 것입니다.
갱신서원: 2년 동안 서원이 다시 연장되며, 유기서원자는 수련소를 떠나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다시말해 그가 끌어안은 삶을 온전히 체험하며 더 깊게 서로를 알기 위해 장엄서원을 한 수녀승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장엄서원: 2년 기간이 끝날 때 온 생애를 서약하는 장엄서원을 합니다. 수녀승은 그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는 삶을 이처럼 결정적으로 끌어안으며, 그의 책임과 권리를 지니고 이제부터는 장엄서원 수녀승들의 그룹에 속하게 됩니다. 장엄서원 후 또는 종신봉헌 후에 카르투시오 수녀승들은 원한다면
동정봉헌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봉헌은 주교를 통해 신성한 신랑과의 분리될 수 없는 외적 상징들인 베일과 반지의 수여 뿐만 아니라 영대의 수여도 포함하는 특별한 예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영대의 수여는 몇가지 전례적 특권을 부여하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특정한 경우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카르투시오 수녀승들은 이 예식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된 삶을 살라고 주님께서 카르투시오회에 말씀하신 부르심에 대한 구체적인 표징으로 보존해 왔습니다. 장엄서원 후에는
계속양성(평생양성)이 뒤따라 이어지며 그 목적은 항구하고 열정적으로 주님을 찾도록 더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것은 열정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또는 가는 길에서 잠들지 않도록 하는데 쓰여집니다. 자신과 주님에 대한 더 나은 지식을 위해 끊임없이 일하는 수녀승은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이 전 생애에 걸쳐 펼쳐지는 변모의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계속양성은 하느님에 대한 맛을 유지시켜주고 궁극적 만남으로 가는 발걸음을 인도해주는 빛과 소금을 마련해줍니다.
4. 증거
A. 세상으로부터 샤르트뢰즈까지
<<왜 우리는 카르투시오에 있는가? 각자에게 적합한 단계와 함께 우리는 같은 길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가족, 친구들, 직업, 취미, 다양한 약속 등 모든 것을 버리는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우리 삶에 만족했고 그 삶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동시에 갈증도 느꼈습니다. 조금씩 우리는 기도가 이 갈증을 진정시켜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우리가 느낀 갈증은 하느님께 대한 갈증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찾았고 그분 역시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만나기를 희망하셨고, 우리를 고독으로 이끄시어 그 길이 우리에게 마련된 그분께 가는 길임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6,6). 우리는 우리의 뜻을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뜻에 일치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과의 만남이 무엇인지 희미하게나마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15,4) 그리고 점점 더 그분의 사랑에 우리를 열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리려는 충동을 그분께로부터 받은 날까지… 어떻게 그분께 모든 것을 다 드렸냐구요? 그분의 섭리는 카르투시오 수녀승들이 존재함을 알게 해 주셨고,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주님께서 우리 안에 넣어주신 고독에 대한 갈망에 부합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수도승원 안에서의 삶을 체험해 볼 수 있기를 청했고 은수자들을 발견하였습니다. 각자는 성당으로 이끄는 회랑을 통해 연결된 각각의 작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수녀승들은 특히 성당에서 모였고, 주일과 축일들에는 공동체 생활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1,12) 성령께서는 우리를 카르투시오의 사막에서 걸어가도록 오랫동안 재촉하셨고, 영원히 거기에 머물도록 우리를 움직이셨습니다.
사막: 고독, 침묵, 평화 그리고 투쟁, 기쁨 또 메마름…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사랑이 아닌 것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롭게 해 주실 때, 모든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가 부활하신 주님과의 일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독한 삶은 또한 형제적 삶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 안에서 우리는 서로 일치를 이룹니다. 이 일치는 교회와 세상의 모든 형제들에게까지 확장됩니다.>>
B. 그분을 위해 노래하는 기쁨
<<카르투시오에서는 신적 전례 동안 어떠한 악기도 사용하지 않으며 무반주로 성가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독수처에서 성가를 연습할 때에는 손으로 연주할 수 있는 작은 악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독수처에서 성가를 연습했을 때 저는 노래하면서 순수한 기쁨을 체험했습니다. 저의 마음을 채웠던 기쁨, 그것을 저는 제 목소리 안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체험을 마치 아주 개인적이고 저와 하느님 사이의 내밀한 것으로 여겨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련장 수녀님이 저를 방문하셔서 성가연습에 대한 저의 체험에 대해 질문을 하셨고, 연습하는 동안 어떤 기쁨을 느꼈었는지 정확하게 물으셔서 저는 조금 놀랐습니다. 그러나 수련장 수녀님은 흥미로워하셨는데 그 체험 안에서 저를 위한 하느님의 부르심이 공동체 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어떠한 표징을 보셨기 때문입니다.>>